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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이야기/존경하는 사람들

[존경하는 사람들] 슬라보예 지젝과의 특별한 만남 IN 건대 2탄-강의자료



저번 포스트에 슬라보예 지젝과의 특별한 만남을 올렸었는데요.

이번 강의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강의 자료 내용이 정말 좋아서 강의자료 일부를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 사령부간 오갔던 전보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출처는 물론 불분명한 이야기입니다만). 독일군이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 아군 전선 상황은 심각하나 파국적이지는 않음." 이것이 바로 우리 중 다수가. 적어도 산업화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이. 점점 더 전 세계적 문제에 대처해가는 자세가 아닙니까? 누구나 생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임박한 파국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왠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지요. 정신 분석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물신적분열(fetishist split)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분연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분열이 생겨날까요? 현재 상황은 영점(zero-point)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월드 워치의 편집 국장이나 환경관련 저자인 에드 에이리스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상황은 우리의 집단 경험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나머지 압도적 증거가 존재함에도 우리는 사실상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 '상황'이란, 우리를 지탱해온 세계에 대한 막대한 생물학적, 물리적 변화의 공습이다." 지질학적, 생물학적 차원에서, 에이리스는 양적인 팽창이 고갈점에 도달하여 질적인 변화를 하는 시점인 영점에 점근적으로 접근하는 꺾는점(급격한 상황전개)을 네 가지 열거하고 있는데요, 이 네 가지란 인구 증가, 자원 고갈, 탄소가스 배출, 생물종의 대량 멸종입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의 집단 이데올로기는 질환 은폐 (dissimulation)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무지에 대한 직접적인 의지로 연결됩니다. "위협받는 인간 사회의 일반적 행동패턴은, 실패하는 와중에 위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권력자들의 대응이 최근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이러한 질환은폐 증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8년 6월 27일, 콜로라도 주 볼더 시의 국립 빙설자료센터(National Snow and Ice Data Center)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북극해의 얼음이 기존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녹고 있으며, 그 해 9월이면 북극 점의 얼음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주요 언론의 보도가 나왔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러한 류의 뉴스에 대한 주된 반응은 긴급대처방안을 긴박하게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할 재앙이 다가오고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등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에 대해 미지근하게 반응하도록 명하는 류의 의견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관적 예측들은 좀 더 균형잡힌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지만 기후 변화는 자원 경쟁 강화, 연안 침수 증가, 영구동토층의 해빙으로 인한 인프라의 피해, 지역별 동물종과 토착 문화가 받는 스트레스 증가 등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상황이 인종분쟁, 사회 소용, 토착 갱단의 지배 등과 연계됩니다. 반면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지점은, 지금부터 새로운 대륙의 숨겨진 보물이 드러나리라는 점, 숨겨진 자원이 이용 가능해지며 그 땅이 인간 거주에 적합해지리라는 점입니다. 1-2년 내로 화물선은 북극 직항로로 운항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는 연료 사용 감소와 탄소가스 배출 감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대기업과 국가 권력은 이미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움직이고 있으며, 이는 단지 (혹은 주로) '녹색 산업'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기후 변화로 인해 새로 열린 자연에 대한 훨씬 단순하고 직접적인 착취를 뜻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오미 클레인(Naomi Klein)이 옳았다는 또 다른 증거에 다름아니지 않습니까? 저서 '쇼크 독트린(Shock Doctrine)'에서 클레인은 세계 자본주의가 (전쟁, 정치적 위기, 자연재해 등의) 재앙을 착취하는 방식에 대해 묘사한 바 있는데. 그럼으로써 '구'사회의 속박을 제거하고 자본주의 아젠다를 재앙으로 인해 비워진 공간에 덧씌운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가오는 생태적 재해는 자본주의를 침식하기는 커녕 사상 최고의 박차를 가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자연 재해는 현재 우리의 생태적 문제가 인간의 오만이나 어머니 지구의 균형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수준으로 격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혼돈이며, 흉폭한 재난, 의미 없고 예측 불가한 재앙을 야기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잔인한 변덕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우리를 굽어살피는 어머니 지구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균형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연장하고 있을 뿐이며 후퇴할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에 대한 위협에 유죄를 자처하는 우리의 준비된 자세는 일견 기만적으로 안심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유죄이고 싶어할 뿐입니다. 유죄이면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끈을 당겨 재앙을 조종할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 삶의 방식만 바꾸면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진정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우리가 앉아서 운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무능한 관찰자로서 온전히 수동적 역할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광적이고 집착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기 쉽습니다. 종이 재활용. 유기농 식품 구매, 뭐가 됐든, 그러므로써 뭔가 하고 있다. 나의 몫을 했다는 안도감을 얻는 것입니다. 집에서 TV 앞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응원팀의 경기를 보는 축구 팬처럼,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든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하는 미신적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생태학에 대한 물신적 거부(fetishistic disavowal)의 전형적 형태는 사실 이렇습니다. "나는 (인류가 위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잘 알지만, 이걸 정말 믿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방식을 바꾼다던가 하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아)." 그렇지만 이와 반대 형대의 거부도 있습니다. "나는 내 파멸로 이어질지도 모를 과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뭔가를 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할 수 없어. 비록 궁극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을 지라도 말이야." 사실 여러분이 유기농 식품을 사는 이유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 반쯤 썩은데다 가격은 터무니 없는 '유기농' 사과가 정말 더 건강한 식품이라고 믿나요? 핵심은, 사과를 구매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상품을 사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관심(concern)과 세계적 의식을 가직 수 있는 나의 역량을 증명하고, 거대한 집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활용도 똑같습니다. 재활용을 하면 어머니 지구를 돕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지요. (특히 별로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간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해결책을 불충분하다고 거부해야 합니다. 생태적 위협을 새로운 생산형태(나노기술)와 새로운 에너지원을 통해 해결 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취급하는 것, 혹은 어떤형태든 신시대의 관념론(New Age spiritualization)으로 해결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생태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 근대의 유기적 사회와 그 전인적 지혜의 노동으로 회귀도 충분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선 우리 상황의 고유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급성 생태적 재앙 혹은 위기 상황에서도 생태학을 손쉽게 자본주의 투자와 경쟁의 무대로 바꾸어 버리는 자본주의의 무한한 적응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닥뜨린 위험의 내재적 성격 때문에 시장적 해결책은 근원적으로 배제됩니다. 왜일까요? 자본주의는 정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만 작동합니다, 그 전제조건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신뢰입니다. 일종의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으로서, 개인의 이기심의 경쟁이 공동선을 위해 작용한다는 보장이 있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지평선에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간섭으로 인해 생태적 재앙, 치명적 유전공학적 변이(biogenetic mutation), 핵 혹은 유사한 군사, 사회적 재앙 등을 촉발함으로써 상황을 파멸적으로 어지럽힐 것이라는 전대미문의 가능성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제한된 볌위의 행동이 제공하는 안전에 기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역사가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건대 강의에서 받은 강의록의 일부입니다.

별로 큰 노력이 들지 않는 재활용같은 행동으로 지구를 돕고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더 큰 재앙,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와 같은 것에는 직접적인 노력을 하고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또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신 지젝 선생님!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강의록 전문이 필요하신 분은 댓글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