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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이야기/존경하는 사람들

[존경하는 사람들] 슬라보예 지젝 건대 강의자료 전문



안녕하세요^^ 

지젝 강의전문을 찾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전문을 올려봅니다.

제가 타자가 많이 느려서 강의록을 다 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여러가지로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 (Possibility of Common Good)-슬라보예 지젝

 

1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 사령부간 오갔던 전보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출처는 물론 불분명한 이야기입니다만). 독일군이 이렇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 아군 전선 상황은 심각하나 파국적이지는 않음." 이것이 바로 우리 중 다수가. 적어도 산업화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이. 점점 더 전 세계적 문제에 대처해가는 자세가 아닙니까? 누구나 생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임박한 파국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왠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지요. 정신 분석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물신적 분열(fetishist split)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그걸 믿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우리가 보고 아는 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실체적 힘을 분연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분열이 생겨날까요? 현재 상황은 영점(zero-point)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월드 워치의 편집 국장이나 환경관련 저자인 에드 에이리스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가 현재 맞닥뜨린 상황은 우리의 집단 경험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나머지 압도적 증거가 존재함에도 우리는 사실상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 이 '상황'이란, 우리를 지탱해온 세계에 대한 막대한 생물학적, 물리적 변화의 공습이다." 지질학적, 생물학적 차원에서, 에이리스는 양적인 팽창이 고갈 점에 도달하여 질적인 변화를 하는 시점인 영점에 점근적으로 접근하는 꺾는 점(급격한 상황전개)을 네 가지 열거하고 있는데요, 이 네 가지란 인구 증가, 자원 고갈, 탄소가스 배출, 생물 종의 대량 멸종입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의 집단 이데올로기는 질환 은폐 (dissimulation)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무지에 대한 직접적인 의지로 연결됩니다. "위협받는 인간 사회의 일반적 행동패턴은, 실패하는 와중에 위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파국적이지만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권력자들의 대응이 최근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이러한 질환은폐 증세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8 6 27, 콜로라도 주 볼더 시의 국립 빙설자료센터(National Snow and Ice Data Center)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북극해의 얼음이 기존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녹고 있으며, 그 해 9월이면 북극 점의 얼음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주요 언론의 보도가 나왔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러한 류의 뉴스에 대한 주된 반응은 긴급대처방안을 긴박하게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할 재앙이 다가오고 있으며,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등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에 대해 미지근하게 반응하도록 명하는 류의 의견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관적 예측들은 좀 더 균형 잡힌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지만 기후 변화는 자원 경쟁 강화, 연안 침수 증가, 영구 동토층의 해빙으로 인한 인프라의 피해, 지역별 동물 종과 토착 문화가 받는 스트레스 증가 등으로 이어지며, 이 모든 상황이 인종분쟁, 사회 소용, 토착 갱단의 지배 등과 연계됩니다. 반면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지점은, 지금부터 새로운 대륙의 숨겨진 보물이 드러나리라는 점, 숨겨진 자원이 이용 가능해지며 그 땅이 인간 거주에 적합해지리라는 점입니다. 1-2년 내로 화물선은 북극 직항로로 운항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는 연료 사용 감소와 탄소가스 배출 감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대기업과 국가 권력은 이미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움직이고 있으며, 이는 단지 (혹은 주로) '녹색 산업'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기후 변화로 인해 새로 열린 자연에 대한 훨씬 단순하고 직접적인 착취를 뜻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나오미 클레인(Naomi Klein)이 옳았다는 또 다른 증거에 다름 아니지 않습니까저서 '쇼크 독트린(Shock Doctrine)'에서 클레인은 세계 자본주의가 (전쟁, 정치적 위기, 자연재해 등의) 재앙을 착취하는 방식에 대해 묘사한 바 있는데. 그럼으로써 ''사회의 속박을 제거하고 자본주의 아젠다를 재앙으로 인해 비워진 공간에 덧씌운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가오는 생태적 재해는 자본주의를 침식하기는커녕 사상 최고의 박차를 가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자연 재해는 현재 우리의 생태적 문제가 인간의 오만이나 어머니 지구의 균형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수준으로 격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혼돈이며, 흉폭한 재난, 의미 없고 예측 불가한 재앙을 야기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잔인한 변덕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우리를 굽어살피는 어머니 지구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균형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연장하고 있을 뿐이며 후퇴할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에 대한 위협에 유죄를 자처하는 우리의 준비된 자세는 일견 기만적으로 안심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유죄이고 싶어할 뿐입니다. 유죄이면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끈을 당겨 재앙을 조종할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 삶의 방식만 바꾸면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진정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우리가 앉아서 운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무능한 관찰자로서 온전히 수동적 역할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광적이고 집착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기 쉽습니다. 종이 재활용. 유기농 식품 구매, 뭐가 됐든, 그러므로써 뭔가 하고 있다. 나의 몫을 했다는 안도감을 얻는 것입니다. 집에서 TV 앞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응원 팀의 경기를 보는 축구 팬처럼,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든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생태학에 대한 물신적 거부(fetishistic disavowal)의 전형적 형태는 사실 이렇습니다. "나는 (인류가 위협 받고 있다는 사실을) 무척 잘 알지만, 이걸 정말 믿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내 삶의 방식을 바꾼다던가 하는 정말 중요한 일을 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아)." 그렇지만 이와 반대 형대의 거부도 있습니다. "나는 내 파멸로 이어질지도 모를 과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뭔가를 하고자 하는 충동에 저항할 수 없어. 비록 궁극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을 지라도 말이야." 사실 여러분이 유기농 식품을 사는 이유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 반쯤 썩은데다 가격은 터무니 없는 '유기농' 사과가 정말 더 건강한 식품이라고 믿나요? 핵심은, 사과를 구매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상품을 사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관심(concern)과 세계적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나의 역량을 증명하고, 거대한 집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활용도 똑같습니다. 재활용을 하면 어머니 지구를 돕기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지요. (특히 별로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간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해결책을 불충분하다고 거부해야 합니다. 생태적 위협을 새로운 생산형태(나노 기술)와 새로운 에너지원을 통해 해결 가능한 기술적 문제로 취급하는 것, 혹은 어떤 형태든 신시대의 관념론(New Age spiritualization)으로 해결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생태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 근대의 유기적 사회와 그 전인적 지혜의 노동으로 회귀도 충분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선 우리 상황의 고유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급성 생태적 재앙 혹은 위기 상황에서도 생태학을 손쉽게 자본주의 투자와 경쟁의 무대로 바꾸어 버리는 자본주의의 무한한 적응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맞닥뜨린 위험의 내재적 성격 때문에 시장적 해결책은 근원적으로 배제됩니다. 왜일까요? 자본주의는 정확한 사회적 조건 하에서만 작동합니다, 그 전제조건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신뢰입니다. 일종의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으로서, 개인의 이기심의 경쟁이 공동 선을 위해 작용한다는 보장이 있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지평선에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간섭으로 인해 생태적 재앙, 치명적 유전공학적 변이(biogenetic mutation), 핵 혹은 유사한 군사, 사회적 재앙 등을 촉발함으로써 상황을 파멸적으로 어지럽힐 것이라는 전대미문의 가능성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제한된 범위의 행동이 제공하는 안전에 기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역사가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필요한 것은 우선 우리의 상황의 고유성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 섬에서 발생한 작은 화산 분화에서 발생한 구름은 지구상의 생명 군의 복잡한 메커니즘에게는 작은 소란에 불과하지만 대륙 전체의 항공 교통을 온전히 마비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인류가 행해 온 모든 위대한 활동과 그로 인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단지 지구 행성 위의 한 생물 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소규모의 분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충격파는 사실 우리의 기술발전으로 인한 것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그만한 규모의 분화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나갔을 것입니다. 기술적 발전은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독립시키는 반면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자연의 변덕에 더욱 종속시킵니다. 수십 년 전 인간이 달에 첫 발걸음을 디뎠을 때 그의 첫 마디는 이랬습니다. “이는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나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이제 한 섬의 화산 분화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에게는 작은 뒷걸음질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후퇴다.”

 

우리의 자유와 자연에 대한 지배가 커갈수록, 우리의 생존 자체는 우리가 자동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일련의 자연 변수의 안정성에 기대게 됩니다(기온, 공기 구성비, 충분한 물과 에너지 공급 등). 우리는 원하는 대로 할수 있지만, 지구상의 생명의 변수를 심각하게 어지럽히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존재가 충분히 미미한 상태에서만 그러합니다. 생태적 혼간으로 인해 명백해지는 인간의 자유의 한계는 바로 우리의 자유와 힘의 기하급수적 증가, 그 자체의 모순적 산물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변화시킬 능력이 증가할수록 지구상의 생명의 기본 지질학적 매개변수가 불안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운명(constellation)은 디페시 차크라바티(Dipesh Chakrabarty)의 지구 온난화의 역사철학적 결과에 대한 이론의 시작점을 제공합니다. 그 주요 내용은 인간과 자연의 역사간 구분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압도적 숫자와 화석연료의 연소와 다른 관련 활동 덕택에 지구상의 지질학적 매개가 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지구상의 생명의 균형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일부 과학자들이 인류 세(Anthropocene)”라 명명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최근 중국 내 발생한 파괴적 지진과 함께 이러한 인류 세의 개념은 새로운 실제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적어도 예상치 못한 지진의 강력함의 주된 원인이 근교의 거대한 싼샤(Three Gorges) 댐의 건설이었다고 결론 내릴 만한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이 댐의 건설로 인해 다수의 새로운 인공호수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한 지표면상의 압력 증가가 지각의 균형에 영향을 주어 지진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진처럼 기본적인 것도 인간 활동의 영향을 받는 현상의 범위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인류 세에 진입함을 인지하였을 때 논리적인 반응은 지구공학(geoengineering) 입니다. 즉 지구의 환경을 큰 차원에서 인간의 필요와 거주에 적합하도록 인위적으로 변경하려는 시도입니다. 현재 고려 대상인 주요 지구공학 기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기의 반사 력을 증가할 방안(지구로부터 태양빛을 굴절시키기 위한 궤도상의 우주 렌즈 설치, 바닷물을 이용한 구름 씨 뿌리기, 혹은 성층권으로 황을 발사하여 알베도(albedo)증가시키기 등), 철이나 요소를 이용한 바다 비옥화(질소 비료). 마음에 새겨야 할 점은 지구공학이 도입된 것이 우리가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독성 배기가스 감축에 실패 했음이 명백해졌을 때였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한 새로운 긴박감 때문에 지구의 기후 시스템의 티핑 포인트가 가까워 왔고, 지구공학을 통한 긴급한 행동만이 대격변을 방지할 유일한 길일 수도 있단 점을 조용히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필연적입니다. 여기에도 문제는 물론 많습니다. 그러한 티핑 포인트의 정확한 정체가 분명하지 않으며 지구공학의 부작용이 예측 불가하다는 점 등 입니다. 그러나 지구공학을 시도하는 것이 이러한 전략을 추구하지 않는 것보다 리스크가 적다는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리스크는 사방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고 우리는 이들 리스크를 다루는 데 과학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자•전문가들은 앎의 주체로 인지되고 있지만, 사실 이들도 모릅니다. 생태적 재앙의 위협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물론 과학적 지식에 의존하지만, 과학이 줄 수 없는 것까지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가 보다 과학적으로 변모하는 데서 두 가지 기대치 않았던 특성이 발생합니다. 첫째는 우리 경험의 가장 은밀한 영역(성과 종교)까지도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경향성이 높아진다는 점, 둘째는 그렇지만 이러한 보편화(universalization)로 인해 과학적 지식의 영역이 일관성 없고 상호적대적인 전부는 아님(non-All)”으로 변모한다는 점입니다. 의견의 다양성(pluralism: doxa)과 단일한 보편적 과학적 진리간의 오래된 플라톤적 차이가 이제 서로 충돌하는 전문가 의견의 영역으로 변모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보편성은 자기 반영성(self-reflexivity)을 수반합니다. 오늘날의 위협은 대체로 외부적(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이 보급한 인간 활동으로 인해 스스로 발생한 것입니다(산업발달로 인한 생태적 대가, 제어되지 않은 유전 공학의로 인한 심리적 대가 등등). 따라서 과학이란 리스크의 원천(중 하나)이자, 우리가 붙들고 위협을 정의해야 하는 유일한 매개물이자, 동시에 위협에 대처하고 탈출구를 찾을 자원(중 하나)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구온난화에 대해 과학•기술적 문명을 탓할지라도, 위협의 범위를 정의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위협자체를 인지하기 위해서 조차 우리는 바로 그 과학을 필요로 합니다(하늘에 난 오존 구멍은 과학자들만이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의 무력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를 전문가의 보증이라는 현혹적인 막으로 덮는 범례적 범주(paradigmatic category)한계 값(limit value)’이란 개념입니다. 얼마나 환경을 더 안전하게오염시킬 수 있는가, 화석연료를 얼마나 더 태울 수 있는가, 스스로의 건강에 대한 위협 없이 독극 물질을 얼마나 더 배출할 수 있는가 등(혹은 인종차별주의 버전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에 빠뜨리지 않은 채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외국인을 더 받아들일 수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명백한 문제는 상황의 불 투명성 때문에 모든 한계 값이 소설(fiction)의 측면, 즉 사실에 대한 자의적이고 상징적인 간섭의 측면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의사가 처방한 혈당 이하면 안전하다고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 유럽의 항공기 운항금지가 풀린 지 일주일 만에, 미디어에서 또 다른 전문가 의견에 따르면 유럽 상공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화산재 구름은 없었다, 모든 소동은 패닉 반응에 불과했다는 식의 보도가 나온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를 믿을 것이냐 입니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에게는, 비록 생태적 혼돈의 영향을 우리가 일부 느끼기는 하나(여기는 가뭄, 저기는 이례적인 강한 폭풍우 등),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이러한 영향과 그 원인 간의 연결고리는 전혀 명백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위협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지속성 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의 종말 같은 것입니다. 파키스탄에서 최근 발생한 홍수나 러시아의 산불의 영향은 멕시코만의 원유유출사태보다 훨씬 재앙적입니다. 거대한 인구밀집지역의 땅이 물 밑으로 사라져서 수백만의 사람이 삶의 터전의 등가물을 빼앗겼을 때, 들판과, 꿈의 상징이었던 문화적 기념물들을 담은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 같은 그들이 어떤 기분일지는 외부인에게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혹은 모스크바 같은 거대도시에서 외출해서 숨을 쉬는 것 조차 안전하지 않을 때의 기분을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수천 세대 동안 가장 명시적 형태의 삶의 기반으로 여겨 왔던 환경이 금이 가기 시작한 것과 같을 겁니다. 유사한 재앙은 역사적으로 늘 발생해 왔고 심지어 선사시대에도 유사한 재앙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과 차이점은, 우리가 마법에서 깨어난종교 이후 시대(post-religious society)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더 이상 거대한 자연의 주기나 신의 분노의 표현으로서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들 재앙은 이제 분명한 원인이 없는 파괴적 분노의 의미 없는 개입으로서 직접적으로 경험됩니다. 파키스탄의 홍수나 러시아의 산불은 자연적 사건인가 인간 산업의 산물인가요? 이 두 가지 측면은 뗄레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섞여있으며, 그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영원히 삶과 죽음의 주기를 지속할 것이라는 기본적 확신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갑니다. 파키스탄의 홍수나 러시아의 산불은 단순한 자연적 재앙으로서 경험되지 않고 자연의 종말이자 자연적 주기의 깊은 동요로서 경험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종말이란 유전공학 분야의 과학적 약진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기체의 성장을 조정하는 생물발생의 메커니즘을 일단 알고 나면, 자연 유기체는 기술적 조작으로 변경 가능한 물체로 변화되어 버립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문명 송의 불만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이란 동물은 문명화된 삶이 요구하는 속박으로 인해 절대 안식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 내부의 무엇인가가 항상 문화에 저항한다.” 현대 과학과 기술로 인해 이 불만은 문화에서 자연 그 자체를 대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탈자연화(de-naturalized)되고 그 관통 불가능한 밀도는 박탈당하였습니다. 이제 자연은 언제든 재앙적 방향으로 폭주할 수 있는 연약한 메커니즘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더 이상 자연의 절차를 이해하고 재현하고자 목표하지 않고, 우리를 놀라게 할 새로운 형태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목표는 더 이상 자연을(존재하는 형태 그대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보통의 자연보다 더 새롭고 위대하고 강한 것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기형의 소, 나무 혹은 보다 긍정적인 꿈인 유전자 변형 유기체 등 모든 인공적으로 산출된 괴물들은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향상(enhanced)’되었습니다. 나노기술 실험의 결과가 어떤 예측 못한 것이 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가 암과 같은 방식으로 통제를 벗어나 번식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경향성은 새로운 인공생명을 창조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에서 그 정점에 달합니다. 지금까지 유전학자들은 자연이 이미 생산한 것을  ‘만지작 거리고 비트는정도에 그쳤습니다. 하나의 유기체에서 유전자를 떼어 다른 유기체의 염색체에 삽입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를 생산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기체의 게놈 자체를 인공적으로 접합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개별적 생물학적 벽돌을 제조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를 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스스로 복제 가능한 합성 유기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생명형을 “Life 2.0”이라고 지정하였는데, 정말 불편한 점은 그렇다면 자연적생명체 자체는 자동적으로 “Life 1.0”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연 생명은 소급적으로 그 자연 발생적 자연적 성격을 잃고 일련의 합성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종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합성 생명이란 자연 생명을 보조하는 것 뿐 아니라. 이를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합성 생명체의 한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날 종종 주장되는 바는 우리가 과학적 전문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학•기술적 태도에서 근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주는 본능적 감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훨씬 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의 상식 그 자체가 신뢰 할만 하지 않다는 점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 상식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세계에 익숙해져 있어 매일의 현실의 흐름이 흔들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태도는 이상하게 나뉩니다. “나는(지구온난화가 전체 인류에게 위협임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걸 믿지는 못 하겠어).” 내 정신이 고정되어 있는 기반인 주위 환경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까? 녹색의 잔디와 나무, 바람의 휘파람, 일출이 모든 것이 흔들릴 것이라고 정말로 상상할 수 있습니까? 오존층의 구멍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 봐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늘상 같은 파랗거나 회색인 하늘만 보일 뿐이지요. 체르노빌 지역에 예전과 똑같은 형태로 거주를 지속하는 농부들이 남아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방사능에 대한 그 모든 이해 못할 말들을 그냥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생태적 위협 중 상당수가 과학과 기술 자체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산업의 생태적 대가, 통제 불가능한 유전공학의 심리적 대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과학을 탓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과학은 리스크의 원천(중 하나)이자, 우리가 붙들고 위협하는 정의해야 하는 유일한 매개체이자, 동시에 위협에 대처하고 탈출구를 찾을 자원(중 하나)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구 온난화에 대해 과학•기술적 문명을 탓할지라도, 위협을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뿐 아니라 위협 자체를 인지하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바로 그 과학을 필요로 합니다(하늘에 난 오존 구멍은 과학자들만이 볼 수 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파르시팔(Parsifal)’에서 나온 상처는 그 상처를 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은 따라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됩니다. 과학 이전의 전체적 지혜로 돌아갈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문제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 과학만이 우리를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의 한계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생태적 위협을 더 이상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전혀 아닙니다. 반대로 상황이 근원적으로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위협에 대해 더더욱 신중해져야 합니다. 복잡계 이론은 이러한 시스템의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설명해 줍니다. 강력한 안정성과 극단적 불안정성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대형 혼돈을 수용하여, 이를 통합하여 새로운 균형과 안정을 찾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한계 (‘티핑포인트’)까지만 그러하며, 그 이상으로 가면 작은 혼돈이 완전한 재앙을 야기하여 완전히 다른 질서의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는 생산활동이 주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연은 벌채, 석탄과 석유의 사용 등의 활동을 수용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티핑 포인트에 접근하는 중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티핑 포인트는 이미 너무 늦었을 때에야 비로소 명확히 인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010년 우리는 지구온난화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많은 논란을 목격하였습니다. 일부 회의론자들은 그러한 현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조차 했습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문제의 심각성이 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욱 혼돈스러우며 자연과 사회적 요소는 긴밀히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측, 예방, 리스크 규제에 대한 발화는 의미 없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럼스펠드식 지식론의 용어에 의하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unknown unknowns)’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을 우리가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티핑 포인트가 언제인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뭘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럼스펠드 지식론에서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습니다. 이 표현(럼스펠드의 지식론)은 물론 2003 3월의 잘 알려진 사건을 가리키는 것인데, 도날드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이 알려진 것과 미지의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아마추어적인 철학화를 약간 시도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는 알려진 것들이 있습니다(There are known knowns).이것들은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아는 것들입니다. 또 알려진 미지의 것(known unknowns)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unknown unknowns)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음조차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럼스펠드가 깜빡 하고 덧붙이지 않은 마지막 네 번째 용어는 이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아는 것(unknown knowns).’ 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일맥상통하며,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지식이라고 라캉이 말하던 것입니다. 럼스펠드가 이라크와 대결 시 주된 위험이 사담 후세인의 위협 중 우리가 어떨 것이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known unknowns)’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대답은 가장 주된 위험은 사실 반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는 것(unknown knowns)’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준수하고 있음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거부의 신념과 가설들 말입니다. 생태학의 경우, 이러한 거부의 신념과 가설들이 바로 재앙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며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이 이들과 결합합니다.

 

왜 꿀벌이 대규모로 사망하고 있는가? 특히 한때 일부 출처에 의하면 전세계 꿀벌 수의 80%를 차지했던 미국에서 왜 이 현상이 두드러지는가? 이 재앙은 식량 공급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음식물의 1/3가량이 충매 식물로부터 오며, 꿀벌은 이 수분의 80%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전세계적 재앙의 가능성은 이런 식으로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빅뱅과 같은 대 충격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침해가 전세계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자연적 균형으로 되돌아가는 일인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떤 균형을 말하는 것인가? 미국과 유럽의 꿀벌이 이미 일정 정도, 일정양식으로 산업오염에 적응했다면 어쩔 것인가?

 

꿀벌의 대규모 사망이라는 사태에는 불가사의한 구석이 있습니다. 동일한 현상이 대부분 (선진국) 지역에서 동시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조사에 따르면 원인이 다릅니다. 특정 살충제의 독성효과 때문이라거나 커뮤니케이션 기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로 인해 공간적 방향감각 상실 때문 등입니다. 원인의 다양성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고리를 불확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역사에서 우리가 배웠듯, 원인과 결과 사이에 간격이 있을 때마다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유혹이 떠오릅니다. 자연적 원인보다 근원적인 부분에 더 깊은 영적 원인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자연과학의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원인으로 인한 현상의 불가해한 동시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여기서 소위 말하는 영적 생태주의(spiritual ecology)’가 등장합니다. 벌집이란 벌이 가혹하게 착취당하는 일종의 노예 농장, 강제 수용소 같은 곳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우리의 착취 행위에 대해 어머니 지구가 보복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영적 해석의 유혹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는 마음에 이렇게 새기는 것입니다. 럼스펠드의 인식론을 다시 빌리자면, 꿀벌의 경우에는 안다는 것을 아는 것들이 있고(살충제에 대한 꿀벌의 취약성), 모른다는 것을 아는 지점이 있습니다(말하자면 어떻게 꿀벌이 인간이 발생시킨 방사능에 반응하는지 등).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아는 것들이 있습니다. 꿀벌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인지조차 하고 있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꿀벌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꿀벌의 연구를 왜곡하고 동시에 윤색하는 그 모든 인간중심의 편견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를 찾도록 몰아 가는 것이 바로 그 무심한 불투명성과 불 가해성 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존재의 근원적 뼈대를 불안정하게 하는 대재앙의 위협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의 첫 번째 자연스러운 반응은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생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을 것이다.’ 어떤 의미이든 아무 의미가 없는 것보단 낫습니다. 숨겨진 의미가 있다면 우주와 일종의 대화를 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에이즈와 생태적 재난에서 홀로코스트까지 잠재적 혹은 실제적 재앙과 맞닥뜨렸을 때, 의미를 찾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9/11 테러에 대한 제리 팔웰 (Jerry Falwell)과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의 첫 번째 반응은, 미국인의 죄 많은 삶 때문에 신이 미국에 대한 보호를 거두어 들인 증거로 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향락적 물질주의, 자유주의, 분방한 성생활을 비난하며, 미국은 당연한 벌을 받은 것이라 주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심층 생태주의자들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지 않습니까? 환경문제를 천연자원의 무자비한 착취에 대한 어머니지구의 복수라고 읽어내는 일 말입니다.

 

2008 11 28,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은 기후변화:자본주의로부터 행성을 구하자라는 제목의 서신을 대중에게 발표하였습니다. 그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어머니 지구는 아픕니다,(Today, our Mother Earth is ill).”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행정부가 추구하는 정치는 물론 전적으로 지지할 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 그 인용된 문장은 그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쾌하게 드러냅니다(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한계에 대해서 보통은 실제적 대가를 치르게 되지요). 모랄레스는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듯이, 특정 역사적 순간에 발생한 원죄에 의한 타락(the Fall)’에 대한 서술에 기댑니다. “모든 것은 1750년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측 가능하게도, 이 타락은 어머니 지구에 대한 우리의 근원을 상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어머니 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여기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자본주의에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어머니 지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고요). 자본주의는 세계의 비대칭과 불균형의 원천입니다.” 이는 즉 우리의 목표는 전통적 성 비유를 담은 우주론인 어머니 지구(와 아버지 하늘)에 가장 잘 구현된 자연적균형과 대칭의 회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류의 생태주의는 신세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이는 대중에게 쇠퇴하는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아편입니다. 이는 한계를 부여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자처하는 지난 세기 종교의 근원적 기능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생태주의자들의 삶의 방식을 급격하게 바꾸라는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이유로 이러한 요구의 저변에는 정 반대의 요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바로 변화와 발전, 진보에 대한 깊은 불신입니다. 모든 급격한 변화는 재앙을 촉발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은 스티븐 제이 굴드와 다른 다윈 주의자들이 반복적으로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바로 자연의 절대적인 우연성입니다. 자연에는 진화나 진보가 없습니다. 재앙, 깨진 평형은 자연의 역사의 일부입니다. 과거 무수히 많은 시점에, 생명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 에너지원(석유)은 과거에 발생한,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재앙의 결과입니다. 균형 잡힌 번식의 장으로서의 자연’, 인간이 오만으로 간섭하여 순환운동을 야만스럽게 탈선시키고 마는 유기적 전개의 장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자연은 이미 2의 자연이 되었습니다. 자연의 균형이란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파멸적 단속(interruption) 후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습관을 수행하는 시도일 뿐입니다. 지구가 우리의 어머니라면 창백하고 피에 목마른 어머니 입니다.

 

현재 선진국의 생태주의자들의 거대 주문인 지속 가능성자체를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속가능성이란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는 닫힌 순환계라는 생각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적 신화입니다. 지속가능성이란 악명 높은 북한의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버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체란 자족, 자립의 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문제는 자연은 절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단지 쓰레기를 생산하는 하나의 거대하고 무분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낭비는 때로는 굴절적응(ex-apted)’되는데, 즉 국지적으로 자기 조직화 될 뿐이다 (자연의 거대한 쓰레기였던 석유를 인간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지속 가능성이란 보다 큰 환경을 희생하는 대가로 스스로의 균형을 강제하는 제한된 과정을 가리킨다는 것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부유하고 생태적으로 각성한 기업 임원의 전형적인 지속 가능한 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숲과 호수에 가까운 녹지의 고립된 계곡 모처에 위치했고, 태양에너지와 소 똥 등 폐기물의 사용, 자연광을 받아들이는 창문 등, 이러한 집을 건축하는 비용(단지 금융비용 뿐 아니라 자연이 치르는 비용)을 생각해 보면 다수가 이런 집을 짓는 것은 금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실한 생태주의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주거는 수백만이 근접해서 살아가는 대도시입니다. 이러한 도시는 수많은 폐기물과 오염을 생산해내지만 1인당 오염 정도는 현대에 시골에서 사는 생태적 의식이 있는 가족의 그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의 임원께서 전원주택에서 직장까지 어떻게 출근하겠습니까? 아마도 집 주변의 풀을 오염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다닐 겁니다. 오늘날의 시장에서 그 유해성이 제거된 일련의 상품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카페인 없는 커피, 무 지방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이 일련의 상품 군에 생태학적 버전을 더해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섬을 창출하기 위해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기.

 

여기서 배워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인류는 보다유연하고유목적 삶을 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인 환경의 변화는 대규모적 사회변화라는 전대미문의 필요성을 강제할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이 있어서 어떤 섬 전체가 거주 불가능해졌다고 합시다. 그 섬의 사람들은 어디로 이주해야겠습니까? 어떠한 조건으로 이주해야 하겠습니까? 특정 땅뙈기를 주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전세계로 흩어져야 할까요? 시베리아 북부가 거주 가능하고 농업에 적합한 땅이 되고, 사하라 이남지역이 현재 인구가 거주하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해졌다고 합시다. 인구의 이주를 어떻게 조직화 해야 할까요? 유사한 일이 과거에 발생했을 때, 사회적 변화는 폭력과 파괴를 수반하여 자발적, 자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모든 국가에 대량학살무기가 존재하는 오늘날의 조건하에서는 재앙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국가의 주권이란 개념은 철저히 재정의되어야 하며 새로운 수준의 세계적 협력이 탄생해야 합니다. 새로운 날씨 패턴과 수자원 및 에너지원 부족으로 인해 발생할 경제와 소비의 막대한 변화는 어떻습니까?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이러한 변화가 결정되고 실행되어야 할까요?

여기에는 우리의 공동 선이 아니라 공공 그 자체가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일종의 공산주의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공산주의(코뮤니즘) 재 실현이 오늘날 그렇게 상상하기 힘든 것입니까? XX 세기에 공산주의의 꿈은 비참하게 실패하여 경제적, 민족-정치적,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생태적으로도 재앙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을 꾸게 만들었던 문제는 현재도 진행 중이며,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집단 활동이 재창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복잡한 사회 속에서 가능하긴 한 것일까요? 오늘날, 불가능과 가능한 것은 이상한 방식으로 분포되어 있습니다. 양쪽 모두 동시에 과잉으로 폭주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과학의 기숙의 영역에서 불가능한 것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습니다(혹은 적어도 우리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불가능한 것은 없다.” 우리는 모든 변태적 버전의 섹스를 즐기고 음악, 영화, TV 시리즈의 전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으며 아무나 우주에 갈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능력 강화, 게놈조작으로 인간의 기본적 특질을 조종하는 전망에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하드웨어에서 다른 하드웨어로 다운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완전히 변화시킴으로써 불멸을 성취하는 기술 영지주의적 (tech-gnostic)꿈이 있습니다.

 

반면, 다른 측면에서는, 특히 사회경제적 관계의 영역에서 우리 시대를 성숙의 시대로 봅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인간은 지난 천 년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버렸고 모든 불가능성과 함께 현실의 속박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즉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적 현실). 당신은 (불가피하게 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낳는) 대규모 공동행위에 참여할 수 없고, 과거의 복지국가 모델에 매달릴 수 없고(이는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경제위기를 낳습니다), 세계 시장에서 고립될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제 이러한 시대가 도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등위 관계를 넘어서고, 전능한 불멸이 불가능함을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급격한 사회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적인 운명론을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시대 말입니다. 이러한 전환에는 고매한 윤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장자크를 심판한다 대화(Rousseau, Judge of Jean-Jacques)’라는 독특한 대화 책에서, 장자크 루소는 잘 알려진 자기애(amour-de-soi: 자연스러운 자아 사랑), 목표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에 대한 장애물을 파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형태의 왜곡된 형태의 타인 대비 자아선호인 자기 편애(amour-propre)간의 구분을 전개하였습니다.

 

원시적 열정이란 직접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하고, 열정과 직접 관련된 물체만 다루도록 만들며 그 원칙은 자기애(amour-de-soi)인 감정인데, 이는 근원적으로 사랑스럽고 온화하다, 그러나 장애물에 의해 목표로부터 주의가 전환되면 이 열정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보다 제거하고자 하는 장애물에 더욱 사로잡혀 성격을 바꾸어 성마르고 증오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고귀하고 절대적인 감정인 자기애가 경쟁애가 되는 과정입니다,. 즉 경쟁 애는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감정이며, 불가피하게 선호를 낳고, 그 향유(enjoyment)는 온전히 부정적이며, 스스로의 난영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불행에서만 만족을 찾고자 노력하는 상태입니다.

 

미국의 작가인 고어 비달 (Gore Vidal)은 간명하게 이점을 서술한 바 있습니다. ‘이기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치 않다.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이 자기애와 경쟁 애간의 대조는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서 문화상태(State of Culture)로의 퇴화에 대한 루소의 기본적인 주제(Motif)의 우수한 예입니다. 자연의 상태에서는 이기주의와 평등주의 간의 갈등이 없습니다, 나의 가장 이기적 본능은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 좋다고 알려 줍니다. 악마적인 인간은 따라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이기주의자는 스스로의 선을 챙기느라 너무 바빠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악인의 가장 주된 악덕은 바로 그가 자신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 더 정신이 팔려 있다는 점입니다. 루소는 정확한 리비도적 메커니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리비도적 투자의 대상을 욕망의 목적물에서 다른 이들의 목적에 대한 접근을 막는 장애물로 옮기도록 하는 전이입니다. 이것은 오클라호마의 폭탄테러든 쌍둥이 빌딩의 공격이든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에서 우리는 단순하고 순수한 증오에 맞닥뜨립니다. 진정한 기독교 혹은 이슬람 사회를 건설하자는 고매한 목표의 달성보다는 방해물인 오클라호마 시청 건물, 혹은 쌍둥이 빌딩을 파괴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등주의 자체를 그 표면적 가치대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되는 이유입니다. 평등 주의적 정의의 개념(및 그 실제)은 지금껏 질투에 의해 존속되어 왔고, 보통은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인 포기의 반대형태의 포기에 의존합니다, ‘나는 이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 그래서 다른 이들도 이것을 갖지 못하게 할 거야!’ 희생의 정신에 반하기는커녕, 악은 스스로의 안녕을 무시할 준비가 된 희생정신 그 자체로서 나타납니다. 나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향유를 박탈할 수 있다면, 이라는 전제 하에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향락적 이기주의사회에서는 진정한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이 완전히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 자기애의 진정한 반대는 이타주의나 공동선에 대한 관심이나 나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질투와 원한입니다. 니체와 프로이드가 공유했던 것은 평등으로서의 정의가 질투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그걸 누리는 타자에 대한 질투입니다. 정의의 요구에 숨겨진 것은 따라서 타자의 과도한 향유를 줄여 모두가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한 접근이 동등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의 필수적 결과는 물론 금욕주의 입니다. 동등한 주이상스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대신 금지(prohibition)를 동등하게 누리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대한 것으로 알려진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금욕주의는 그 반대의 형태를 띱니다. 일반화된 초자아의 강제명령(injunction), 혹은 즐겨라!”라는 명령의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명령의 주문하에 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향유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방해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르시스트적 자아실현과 조싱 건강식 등의 온전한 금욕과 극기를 조합하는 여피족을 보십시오. 어쩌면 이것이 니체가 최후의 인간 (Last Man)의 개념을 말할 때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여피의 쾌락적 금욕주의라는 외양에 숨은 그(최후의 인간)의 윤곽을 진정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늘에 와서이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그렇다면 우리가 루소에 대해서도 해야 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우면,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을 문화의 신화(myth of culture)로 취급한다면, 루소에게서 배울 점이 많이 있습니다. 헤겔은 알고 있었지만, 인류의 타락(the Fall)’이란 자연에서 문화로의 진행의 다른 이름입니다. , 원래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동물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탈 자연화된 질투의 우주가 있었으며 질투로 인해 인류는 어리석은 야만적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신화입니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혹시 어쩌면 그걸 넘어서면 그 너머에 뭔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너머는 루소가 좋아할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즉 단순히 공리적 이기주의를 환기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의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는 종종 생태적 위기는 우리의 단기적 이기주의의 결과라는 말을 듣습니다,. 당장의 쾌락과 부에 사로잡혀 공동선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의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개념이 중요해지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진정한 자본주의자는 쾌락적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반대로 스스로의 부를 불리는 업에 광적으로 충실하며 이를 위해 자신의 건강과 행복뿐 아니라 그 가족의 번영과 환경의 안녕까지도 저버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왜곡된 광적 헌신에 대항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고결한 도덕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한 이기주의와 공리적 관심을 적당히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시 말해, 루소가 자연적 자기애라고 불렀던 것을 추구하려면 고도로 문명화된 수준의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